우리는 살면서 여러 가지 선택을 합니다. '주식을 지금 팔자', '오늘은 내가 쏴야겠다',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줘야지' 등의 선택을 하겠죠. 오늘은 우리가 하는 수많은 선택 중에서 어떤 선택이 옳은 선택인지 도덕적인 관점에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사례 한 가지를 보고 이 사례를 아리스토텔레스,밀,칸트,니체 각각의 관점에서 각각 어떤 선택을 무슨 이유로 할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조난당한 아이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에서 소박하게 살고 있던 재단사에게 아들이 한 명 있었다. 그 재단사는 자기 아들이 가업을 물려받기를 바라셨지만, 아이는 훨씬 더 잘살고 싶었다. 어느 날 밤, 아이는 집을 나와 유럽으로 떠날 결심을 하였다. 바다를 건너기 위해 아이는 뗏목을 만들었다. 그런데 육지에서 멀어지자마자 바람도 멈추고, 물이나 먹을 것도 금세 다 떨어졌다. 그렇게 아이는 굶주린 채 지중해 한가운데를 떠다니게 되었다.
여러분이 남부 유럽의 해안가에 살고 있는데, 어느 날 아침 신문에서 이 아이의 이야기를 읽었다면 직접 그 소년을 구하러 가시겠습니까?
아리스토텔레스(덕윤리자)
덕윤리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삶을 사는 방법은 무엇인가?"라고 물을 겁니다. 그에 따르면 최고의 삶은 '덕'이라는 측면에서 탁월함을 나타내는 사람의 삶입니다. 감정을 적절히 조절하는 능력, 이론적 진리, 실천적 지혜 등이 탁월한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이를 구하는 것이 도덕적인 품성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소년을 구해야 한다고 말할 겁니다. 좋은 품성을 갖춘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 모두에게 각자 다르게 다가옵니다. 우리가 부자이거나 권력자라면 아이를 구하기는 쉬울 것입니다. 분명히 옳은 일이지만, 자신의 품성을 특별히 드러내는 일도 아니므로 대단히 도덕적인 일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반면, 수단이 거의 없는 사람이 아이를 구하기로 결정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려고 애쓴다면, 그것은 진실한 자신의 품성이 드러나는 것이며, 도덕적인 행동이므로 여러분도 시도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밀(공리주의자)
공리주의자인 존 스튜어트 밀은 어떤 행동이 최대 다수의 행복을 증진하는지 물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 최대 다수에게 최대의 이득이 되는 행동을 선택하는 것이 공리주의의 핵심입니다. 마치 어떤 결과가 수많은 행복을 극대화할 수 있는지 미리 계산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이 아이를 구하려 한다면 이 모든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 아이와 아이의 가족이 얻게 될 행복, 그로 인해 여러분이 느낄 기쁨, 현재 우리 사회와 미래 세대에 생길 수 있는 이득까지 포함하여서 말입니다.
그러고 나서 이 모든 이득과 아이를 구하는 일 대신 할 수 있었던 일, 즉 기회비용을 비교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목숨을 걸고 직접 바다로 나가는 대신 커피숍에서 일을 하고 번 돈으로 좋은 자선단체에 기부하여 기아에 허덕이는 다른 두 아이를 구할 수도 있습니다. 두 가지 선택지를 비교한 끝에 여러분이 아이를 구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대신 일을 하여 기부함으로써 인류의 복지를 두 배로 증진할 수 있다면, 이를 효율적 이타주의라고 부릅니다.
칸트(의무론자)
의무론자인 임마누엘 칸트에게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하게 된 동기입니다. 결과보다는 동기가 더 중요합니다. 의무론자들은 보편적인 도덕 법칙을 믿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마라, 도둑질을 하지 마라, 속임수를 쓰지 말라 같은 것들이 그 예입니다. 이는 소위 '정언 명령'이라 불리는 개념인데, 도덕적으로 옳은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그 결정이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법칙이 될 수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여러분이 아이를 돕는 이유가 단지 멋져 보이기 위해서라면, 그 동기는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소년을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세상은 잘못된 영웅 놀이가 보편적인 도덕 규칙이 된 세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아이를 구하는 이유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는 일이 언제나 옳은 세상에 살고 싶기 때문이라면, 그런 일은 마땅히 해야 합니다. 심지어 그 아이가 결국 여러분의 선의를 악용할 것이라는 증거를 발견하더라도 말입니다.
니체
프리드리히 니체는 "무엇이 당신에게 이득이 되는가?"라고 물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행동이 우리를 더욱 강하게 만들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옳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가 강해지면 사회도 더 강해지며, 반대로 자신의 이득에 반하는 행동은 발전을 막기 때문에 도덕적이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아이를 돕는 것이 여러분에게 이득이 된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아이를 도와야 합니다. 하지만 아이를 구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해가 될 것이라 생각된다면,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책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론
이 네 가지 중 여러분의 결정에 도움이 된 것이 있었나요? 없었다면, 여기 한 가지 아이디어가 더 있습니다. 모세 커플이라는 학자의 관찰에 따르면, 공리주의자와 칸트학파는 서로의 의견에 반박할 때 자신이 속한 학파의 도덕 원칙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대신 양측 모두 마치 우리가 모두 본능적으로 옳고 그름을 구별할 수 있는 것처럼 감정에 호소합니다.
칸트학파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아이들이 죽어가는 세상에 살고 싶습니까?" 반면, 공리주의자들은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설마 여러분이 구하고 싶은 것이 사이코패스는 아니겠죠? 그를 구해주고 나면 오히려 여러분과 여러분 가족까지 해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을 돕는 것이 언제나 옳다는 원칙이 있으십니까? 하지만 그게 틀렸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어쩌면 우리 모두 무엇이 도덕적으로 옳은 판단인지 본능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제부터 살아가면서 할 많은 선택이 있을 겁니다. 그때마다 스스로를 믿고 마음이 가는 대로 해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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