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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

by SeeJoy 2025. 2. 22.

철학은 일종의 행복의 형이상학이다. 이는 바디우가 행복의 형이상학에서 한 말이다. 실제로 많은 철학자들이 어려운 논리학, 언어학, 형이상학 등을 논하고, 그 끝에 ‘어떻게 행복하게 살 것인가’에 대한 자기만의 답을 내놓았다.
 니체는 끝없는 힘의 의지 추구를 통해 위버멘쉬로 거듭날 것을, 칸트는 도덕적 의무를 따르는 삶을 추구할 것을 주장했다. 러셀은 의지와 용기, 명랑함을 행복의 조건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그 무수한 철학적 행복론을 거슬러 올라가면 맨 앞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자리 잡고 있다.
 그는 자신의 대작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정치학을 통해 행복이 무엇인지, 또 그것을 왜 추구해야 하며, 어떻게 추구해 나가야 하는지를 논했다. 그의 행복론은 오늘날 단순한 철학 영역을 넘어 자기계발서, 심리학, 처세서 및 각종 행복 관련 서적들의 첫머리를 수놓고 있다.
 그렇다면, 대체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이 뭐길래 오늘날까지도 그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는 걸까? 한번 살펴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서양 윤리학의 토대가 된 책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이 세운 학교에서 한 강의 내용을 묶은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삶의 궁극적 목적을 행복이라고 했다.
 그 논의를 따라가 보면 이렇다.
 일단 인간은 여러 가지 활동을 한다. 먹고 살기 위해 직업 활동을 하고, 즐기기 위해 취미 활동을 한다. 이 다양한 활동들은 모두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 이루어진다. 예컨대 운동의 목적은 건강이며, 재테크의 목적은 돈이고, 군사훈련의 목적은 승리다.
 이처럼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활동을 하고 있으며, 그 활동마다 다양한 목적이 있다. 그렇다면 이 목적들은 제각기 흩어져 따로따로 추구해야만 하는 것일까?
 아니, 그렇지 않다. 각 목적들을 패키지로 묶어 위계를 세울 수 있다.
 가령, 고3 학생이 모의고사 문제를 열심히 푸는 목적은 수능을 잘 보기 위해서일 것이다. 수능을 잘 보려는 목적은 원하는 대학에 가기 위해서일 것이고, 원하는 대학에 가려는 목적은 원하는 직업을 얻기 위해서일 것이다. 또, 원하는 직업을 가지려는 목적은 명예나 높은 연봉, 혹은 자기 실현이나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렇듯 각 활동의 목적은 더 높은 목적의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목적의 목적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행복’이라는 최종 목적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행복, 최고의 좋음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좋은 것들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이자, 목적들 중 최고의 목적이라는 뜻에서 최고선이라고 불렀다. 그리스어로 행복을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라고 하는데, 어원적으로 에우(eu)는 ‘좋은 상태’, ‘잘하는 상태’를 뜻하고, 다이몬(daimon)은 ‘신적인 존재나 힘’을 뜻한다.
 즉, 에우다이모니아는 ‘신적 존재나 힘이 돌보는 좋은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스인들은 이러한 어원적 의미를 받아들여 행복을 에우다이모니아라고 불렀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바로 ‘행복을 최고선이라고 번역할 때의 선이라는 단어다.
 그리스어에서 아가토스는 도덕적 선함이라는 뜻도 있지만, ‘좋음’ 또는 ‘훌륭함’이라는 뜻도 있다. 이는 마치 한자어 선이 ‘착할 선’과 ‘좋을 선’ 두 가지 의미를 가지는 것과 비슷하다. 영어 good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그 사람 참 좋은 사람이야”라고 할 때는 ‘좋음’과 ‘착함’의 뜻이 함께 들어가지만, “그 노트북 참 좋아”라고 할 때는 ‘착하다’는 뜻이 아니라 ‘기능적으로 훌륭하다’는 의미가 강조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활동할 당시 아가토스는 ‘착함’보다는 ‘좋음’과 ‘훌륭함’의 무게가 더 실려 있었다. 따라서 여기서는 아가토스를 ‘선’이 아닌 ‘좋음’으로 번역하도록 하겠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왜 행복을 최고 좋음이라고 했을까?
 그는 두 가지 이유를 들었다. 바로 완전성과 자족성 때문이다.
 

 

행복이 최고의 좋음인 이유
 

 

먼저, 완전성이란 행복이 그 자체로 목적이기 때문에 추구된다는 의미이다. 즉, 행복은 목적이 될 수는 있어도, 다른 목적의 수단이 될 수는 없다.
 가령, 우리는 돈을 많이 벌기 위해 행복해지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행복해지기 위해 돈을 번다. 행복보다 상위의 목적은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자족성이란 행복이 오로지 그 자체만으로도 삶을 선택할 만한 것으로 만든다는 의미이다. 즉, 행복 이외에 굳이 다른 좋음을 추구하지 않아도 충분한 삶의 동기가 된다는 것이다. 행복하기만 하다면 모든 것이 충족되므로, 이것이 바로 최고 좋음이 될 수 있다.
 이처럼 행복은 완전하고 자족적인 것이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최고의 좋음으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목적론적 세계관에서는 부, 건강, 명예, 우정 등을 향한 모든 활동이 결국 행복을 위한 목적으로 수렴된다. 그리고 최고의 좋음을 탐구하는 학문이 바로 윤리학이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윤리학에서 단순히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좋고 훌륭한 행위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행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할 때의 ‘좋은 사람’이란, ‘좋음’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서 끝까지 추구해 나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무엇인지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세간에 통용되는 행복론을 두루 검토한다. 그런데 행복에 대한 통념은 그가 살던 시대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바로 부, 명예, 그리고 쾌락적인 삶을 살면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쾌락적인 삶
 

 

먼저, 쾌락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술과 음식, 성적 쾌락 같은 육체적 쾌락은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들도 추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즉, 감각적 즐거움을 누리려는 것은 모든 동물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좋음’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행복, 즉 최고 목적이자 최고 좋음이라는 개념에 부합하지 않는다. 만약 최고 목적이 쾌락에 있다면,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나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생물에도 위계가 있다는 그의 자연학 이론과 어긋난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쾌락적 삶 자체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정신적 쾌락은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부산물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기쁨, 즐거움, 만족감 같은 정신적 쾌락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것이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최고 좋음, 즉 인간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객관적 행복이 될 수는 없다고 하였다.
 

 


 

 

다음으로, 부를 살펴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부는 최고 목적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돈 자체를 위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다. 돈은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수단일 뿐이다.
 만약 누군가에게 “당신은 왜 그리 열심히 돈을 법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그냥 돈이 좋아서요.”라고 대답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그의 삶은 행복이라는 최고 목적이 빠져 있기에 공허한 삶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돈이 행복한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돈과 멋진 외모를 갖추면 삶에서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고, 생존의 불안이 줄어들기 때문에 행복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보았다.
 다만, 부와 외모에는 운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에, 그것이 객관적인 행복이 될 수는 없다. 행운과 행복을 동일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명예로운 삶
 그렇다면 명예로운 삶이 행복한 삶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 역시 행복의 본질이 아니라고 보았다. 물론 한 사람이 시민으로서 공동체의 이로움을 증진한다면, 당연히 명예라는 정치적 좋음이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좋음이 남이 나에게 선사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앞서 최고 좋음이 되기 위한 두 가지 조건이 무엇이었는가?
 바로 완전성과 자족성이다.
 그런데 명예라는 좋음이 나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남이라는 외부로부터 주어진다면, 이는 자족성에 어긋난다. 결국, 명예는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에게 초점이 맞춰진 것이므로, 행복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쾌락이나 부처럼, 명예 또한 행복한 삶을 살면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기에 좋은 것이다. 다만, 최고 좋음은 아닐 뿐이다.
 행복은 주관적인 것이 아니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쾌락, 부, 명예가 인간만이 추구하는 목적이 아니라는 점, 그것들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라는 점, 그리고 운이나 타인이라는 외부 요인에 의해 좌우된다는 점에서, 그것들이 최고 좋음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즉, 행복은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삶의 궁극적 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