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는 실존주의자 사르트르에 대하여 알아볼 겁니다. 그전에 우선 실존주의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보자면 실존주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와 유신론적 실존주의가 있습니다. 그중 오늘의 주인공 사르트르는 대표적인 무신론적 실존주의 입니다. 그럼 한번 사르트르를 알아가보도록 합시다.
사르트르
사르트르라고 한다면 단연코 이 말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하지만 우리에게 '실존'과 '본질'이란 단어는 너무 익숙하지 않다. 따라서 이 단어들과 친숙해지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다.
사물
아래 사진에서 신발들은 모두 모양이 다르고 색깔도 각양각색입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신발입니다. 또한 접은 박스로 발을 보호한다면 그 박스도 신발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신발의 본질은 발을 보호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의자의 본질은 앉는 것이고 우산의 본질은 비를 막아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본질이란 '어떤 것이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
우리의 주변을 돌아보면 여러 사람이 보입니다. 모두 다 다르게 생겼죠. 모두의 피부색이 다르고 생김새도 성격도 다 다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데카르트처럼 생각하는 게 인간의 본질일까요? 아닙니다. 아무리 생각을 못 한다고 해도 인간은 인간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사르트르는 인간에게는 본질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목적,기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그냥 존재하는 것입니다. 존재하고 싶어 존재하는 것이 아닌 우리는 그냥 태어난 겁니다. 우리는 '세상에 그냥 던져진 존재자'입니다. 이것을 피투성이라고 합니다. 즉 인간이 태어난 목적이나 기능, 가치는 없고 인간은 그냥 실존하는 존재자입니다. 그것이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유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규범도 무엇을 해야 한다는 의무도 주어진 역할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는 조금 부담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매 순간 어떠한 선택에 직면합니다. '운동을 할지 말지',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 어떤 인생을 살아갈지 선택합니다. 그 선택은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선택에 정답이 없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목적이나 기능이 없으니까 정답이 없고, 그에 따라 선택이 어려워집니다. 따라서 인간은 불안합니다. 인간의 불안은 정답이 없는 문제지를 받았기 때문에 불안한 겁니다. 따라서 인간은 불안을 피하기 위해 자기기만을 합니다. 즉 자신에게 어떤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없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아르바이트나 샐러리맨 등의 일을 할 때 이 일이 자신의 천직인 것처럼 동요를 겪지 않고 일에 매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르트르는 이것을 자기기만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자신에게 이것 말고 다른 것을 할 수 있는 선택지가 없는 것처럼 자기를 스스로 속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들어 가는 인생
하지만 인간에게 정말로 정답이 없을까요? 사실 모든 게 다 정답입니다. 선택의 정답은 나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게 정답입니다. 따라서 내가 어떤 선택 하면 그것이 나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되는 겁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선택하면 욕망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되고,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겠다고 선택하면 나의 의무가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됩니다. 가치는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는 순간 거기서부터 생겨나는 겁니다. 따라서 내가 선택한 모든 것이 사실 다 정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계속 어떤 선택을 하면서 미래로 나야가야 되서 불안해하지만, 인간은 어떤 것을 선택하면서 자신을 계속 미래로 던져야 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기투하는 존재'입니다. 기투란 인간이 현재를 넘어서 미래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던지는 실존의 방식입니다. 단 인간은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선택이 어려운 이유는 선택에 따른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선택할지 묻거나 자신의 선택을 위임하는 경우는 선택에 대한 책임을 조금이라도 전가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사실 남에게 물을 필요 없습니다. 그냥 나만의 선택하고 그것이 정답인 양 행동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완전히 내 마음대로 선택해도 되는 건 아닙니다. 내가 한 선택은 인간의 보편적인 선택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선택함으로써 만들어낸 나만의 가치는 더 이상 나만의 가치가 아니라 모든 사라들의 가치가 되기 때문에 나의 선택이 타인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생각해 보고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것을 앙가주망(engagement)이라 합니다. 어떤 구속, 제한, 계약 이런 뜻입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앙가주망은 정치나 사회 문제에 참여하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즉 내가 어떤 것을 선택할 때 사회적 책임도 고려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무리
그러면 정리 해 봅시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냥 던져진 존재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유롭게 어떤 것을 선택하는 순간 거기서부터 가치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 가치는 나만의 가치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가치입니다. 이 점을 생각하고 인간은 자기 자신을 세상에 내던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요?
인간은 모두 자신만의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그 가치로 새로운 선택을 내려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냅니다. 하지만 때때로 우리는 자신의 가치에 반하는 선택도 합니다. 예를 들면 다이어트 중에 치킨을 먹는다던가 잘못된 걸 알면서도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는 것 등이 있죠. 우리는 이러한 선택을 최소화하고 자신만의 가치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던 평지에 굳건한 탑을 쌓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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